▲ 중국/ 시안/ 야경이 아름다운- 시안 쭝루(西安 鈡樓/ Bell tower)
시안( 西安/ Xī'ān/ 西京)은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성도로 인구 약 850만명(2010기준)이 산다.
시안은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로,
역대 중국 역사 중 가장 많은 '황조의 수도'였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100년을 알려면 상하이(上海)에, 500년을 알려면 베이징(北京)에,
3,000년을 알려면 시안(西安)에 가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古都이다.
- 중국문명의 발상로서 주나라에서 부터 진- 漢- 唐나라 등
중국의13개 황조가 1100년동안의 수도였던 곳이다
가장 번창했던 唐代에는 인구 10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도시로
이탈리아의 로마와 이집트의 카이로 그리스의 아테네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영원히 평화가 지속된다는 의미로 '長安' 이라고 불리게 되었음.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
시안 성벽을 필두로 진지황의 묘와 병마용갱 외에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멘스가 있는 화청지가 있으며
그리고 시안사변이 발생한 곳도 시안이다.
현재의 시안에는 명(明)나라 때 구축한
주위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와 교외로 되어 있다. ^^*
▲ 중국/ 시안
▲ 중국/ 시안/ 시안성 지도/
- 북문/ 영닝먼(永寧門)에서 관광차(바테리카) 타고 약 1시간 동안 시안성벽 위를 한바퀴 탐방했다.
시안성벽은 명나라 때 축조된 것으로 길이는 13km
*시안성벽 입장료 : 54위안/ *오토카 관광차 80위안
▲ 중국/ 시안/ 시안성 모형도
▲ 중국/ 시안/ 시안성
▲ 중국/ 시안/ 시안성/ Yongningmen(永寧門/영녕문/ 북문)
▲ 중국/ 시안/ 시안성/ Yongningmen(永寧門/영녕문/ 북문) 야경
▲ 중국/ 시안/ 야경이 아름다운- 시안 쭝루(鈡樓/ Bell tower)
▲ 중국/ 시안/ 야경이 아름다운- 시안 쭝루(鈡樓/ Bell tower)
최고의 중루의 야경& 친절한 중국 아지매!
- 저녁 식사후 시내버스(2층)를 타고
영닝먼(永寧文) 일대와 쭝루의 야경을 보러 나갔는데 야경에 매료되었다.
가는 버스 속에서 만난 40대 중국 아짐의 친절에 감동을.....
내가 중루에 간다고 했더니 그녀는 내게 버스를 잘못 탔다며 펄쩍뛰었다.
이 버스에서 내려 반대편에서 다른 버스타야 된다며
그녀는 나와 함께 버스에서 내려서
학생들한테 나를 종루까지 좀 데려다 주라는 부탁을 하기도....
나는 내가 탄 버스가 종루의 반대쪽으로 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타깄했으나
아짐의 친절한 안내에 고마워서 몸둘 바를 몰랐다.
"씨에 씨에~~ " 만 연발을....ㅎㅎ
▲ 중국/ 시안/ 시안/ 싸우스 스트리트와 쭝러우(南大街& 鈡樓)
▲ 중국/ 시안/ 명마용갱/ 진시황 동상
진시황(秦始皇/ B.C 246~210) 은
진(秦)나라의 36대 군주로 본명은 '정(政)', 13세 때 즉위,
B.C 221년에 6개국을 통합,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다..
스스로 전설의 성군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皇帝'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 '始皇帝'
- 기원전 230년에 진나라 군대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부터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 6개국이 잇달아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인가?”
진시황과 마오쩌둥(毛澤東) 두 사람이 1, 2위를 다툰다.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었고,
진시황은 그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 이전에도 중국 역사는 오래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그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마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뉜 채로 발전해 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뜻에서 마이클 하트가 펴낸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에서는
진시황이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을 제치고 '18번째'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꼽혔다.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편집)
▲ 중국/ 시안/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박물관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1호 갱)
진시황릉 병마용갱(秦始皇陵兵馬俑坑)
= 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km 떨어진 병마도용을 수장한 지하 갱도 =
이병마용 갱은 1974년 서안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산시성 고고학 발굴팀은 1974년 7월 15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총면적 25,380m2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은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m2로서,
본래 이 갱 위에는 길이 210m, 넓이 9칸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지만,
진나라로 쳐들어온 항우에 의해 많은 도용들이 파괴되어 정확한 개수의 파악은 어렵다.
도용의 크기는 1.75~1.9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로 실물보다는 조금 크게 만들어졌다.
병사들은 겉옷만 입은 것과 겉옷 위에 갑옷을 입은 병사로 구분되어 있다.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도용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컬러로 채색된 도용이었으나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자 불과 몇시간만에 모두 색이 바래버렸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진시황를 병마용갱[秦始皇陵兵馬俑坑] (두산백과)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1호갱)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1호갱)
진시황의 병마용갱 박물관 탐방.
여행사의 투어로 가면 쉽고 편하게 갈 수도 있었지만,
호스텔의 스텝한테 물어봤더니 아침 07시에 출발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혼자서 일반버스를 타고 물어 물어 어렵게 '병마용갱 박물관'에 찾아갔다.
- 병마용갱은 1974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발견, 세상에 알려지게된 곳이라는데
그 규모가 큰 것에 놀랐고, 그 많은 6,000여개의 병마용을 16세기 당시에 어찌 만들었는지,
특히 병마용의 얼굴 표정이 각기 다르다는데...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ㅌㅌㅌ
병마용들은 대부분 1호갱에서 출토되었고, 2호갱은 발굴품이 미미했다. ^^*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1호갱)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갱)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 장수
▲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제1관
▲ 중국/ 시안/ 화칭츠(華淸池)
화칭츠(華淸池)와 화청궁
-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머물며 가무음곡과 온천을 즐겼던 곳이라는데
궁내부의 건물들과 정원 등을 잘 꾸며 놓아 볼만했다.
베이징의 '이화원'이나 쑤저우의 '졸정원' 보더 이곳이 더 좋았았던 것 같다.
- 화청지에서 '양귀비의 일대기'를 극으로 재구성한
'장한가'를 매일 저녁 공연하고 있다는데
시간이 여의칠 않아서 보지 못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장한가는 '중국의 5대 공연' 중에 하나라고 한다. ^^*
중국판 1212 사태(西安事變)의 현장
- 화청궁내에 중국판 1212 사태인 서안사변때에 장제스가
감금되었다는 방과 자료 등을 전시해 놓은 곳을 볼 수가 있었다.
장제스가 억류되었던 곳은 화청지 뒤쪽 언덕에 위치한 '양귀비 목욕탕'이다.
1212 시안사변(西安事變)/은?
1936.12.12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가 시안을 방문하여
북동군 총 사령관인 장쉐랑(張學랑)에게 공산당 공격을 독촉하려다
오히려 장제스가 장쉐랑에게 체포되는 사건이었다.
장쉐랑을 장제스에게 항일전쟁을 위한 2차 국공합작을 강요하였다는데,
주은래와 장쉐랑의 협상으로 장제스는 가까스로 풀려나
제2차 국공합작을 시도 항일전쟁을 수행함.
그후 장쉐랑은 장제스 휘하로 자진해서 들어와 벌을 받았고
나중에 타이완까지 끌려와 구금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멸 직전에 있던 중국공상당이 기사회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시안사변은 중국 근대사에 큰 흐름을 바꾼 사건이기에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지만, 볼거리는 별로 없다.
- 역사란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 장제스 정권(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물리치고
거대 중국을 장악했다면 지금의 중국보다 훨씬 더 잘사는 강국이 되었을지,
아니면 하찮은 3류 나라가 되었을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 하기만...ㅌㅌㅌ
▲ 중국/ 시안/ 화칭츠(華淸池)
▲ 중국/ 시안/ 화칭츠(華淸池)
▲ 중국/ 시안/ 화칭츠(華淸池)
▲ 중국/ 시안/ 화칭츠(華淸池)
▲ 중국/ 시안/ 화칭츠(華淸池)/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 중국/ 시안/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멘스
# 현종(이융기/ 향연 78세)
- 당나라 6대 황제
양귀비(본명 양옥환)는 현종의 애첩, 38세에 비참한 죽음
*키 158cm, 체중 75kg, 글레머
본래 양옥환은 현종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현종이
그녀를 자신의 13남인 수왕 이모에게서 가로챘던 것이다.
한마디로 현종은 며느리를 첩으로 삼은 것!
현종의 나이 61세 때에 양옥환은 26세 '貴妃에 책봉' 되었다.
귀비는 황후 다음의 서열로 당시 황후는 죽고 없었기에
그녀가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다시피 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현종은 죽은 양귀비의 아버지에게 '대위제국공'이란 벼슬을 추증하고,
그녀의 숙부와 3명의 친오빠에게 높은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양귀비의 자매들인 3명의 언니들을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여
양씨 가문의 세도를 증강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현종은 양귀비의 자매들 중에서도 귀비의 '셋째언니' 괵국부인에게도 반해,
그녀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다.
언니를 질투한 양귀비는 괵국공주의 황궁 출입을 막았다.
이에 진노한 현종은 양귀비를 궁에서 내쳤다.
그 이후, 현종은 주변의 요청을 받아들였여 다시 양귀비와 화해를...
양귀비와 같이 이곳 화청궁(華淸宮)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의 육체를 보게 된 늙은 현종은 다시 그녀에게 빠져들게 되었다는.... ㅌㅌ
이후,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현종은 시안에서 사천성으로 도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양귀비 일가족의 권력집중에 불만을 품은 현종의 호위군사들에 의해
양귀비의 오빠 - 양국충이 그자리에서 척결되었고,
군사들은 양귀비의 목숨까지 요구하자 현종도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양귀비는 목을 매어 자살하게 되는데 그녀의 나이 겨우 38세... (美人薄命)
살아서는 부귀영화를 누비며 천상의 공주처럼 살았고, 죽을 때는 처참하게 생을 마감.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했던고...
양귀비의 죽음으로 당나라도 쇠락의 길로......ㅌㅌ
"부귀도 영화도 구름 인양 간곳 없고...." ㅌㅌㅉ
# 중국의 4대 미인 : 양귀비, 서시, 호선, 왕소군
▲ 중국/ 시안
▲ 중국/ 시안/ 중국 여해중 처음 먹어본 족발
▲ 중국/ 시안
▲ 중국/ 시안/ 상지먼 유스호스텔
Traveller's Memo
10/30(금),갬, 여행 9일차/ 진시황병마용갱, 화청지 탐방
(일정)
0700 겟업
0900 숙소 이동/ 00 호텔 - 상즈먼 호스텔
*1030- 1200 시안 시외버스터미널- 병마용 유적지/
*1240-1400 병마용갱 박물관 탐방
*1430-1630 화청지 탐방
*1630-1730 화청지~시안/ 버스
1800 숙소 컴백/ 상즈먼 호스텔
1900 디너
*2000-2100 중루, 영녕문 야경
2130 숙소 컴백/ 2400 취침
(비용)
*시외버스 10위안/ 시안- 병마용갱/ 완행
*병마용갱 입장료 120(\2만)/
*화청지 입장료 120(\2만)/
런치 35/ 치킨앤 살라드
택시 40/ 버스정거장- 호스텔
디너 90/ 샤부샤부, 볶음밥
바나나 ,생수 12/ 10+2
시내버스 6위안/2위안*3회
(필링)
앗! 내 여권은 어디에...?
- 병마용갱 가려고 버스터미날 입구에 도착,
티킷팅을 하려고 여권을 찾아보니 포켓에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항상 자켓의 왼쪽 가슴의 포켓에 넣고 다니는데
포켓 지퍼가 열려있고 여권이 없었다.
한참 찾아보니 핸드폰 전용인 오른쪽 주머니 속에 여권이 들어있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휴~~ 10년은 감수했다.
- 왜 여권이 앞 포켓에 있던게 다른쪽 포켓에 있었는지 생각해보니
아침에 숙소를 옮기면서 새로 옮겨간 호스텔에서 체크인 하면서 꺼내서
다른 주머니에 넣었던 것 같다.
# 여행의 필수 3종 세트- 여권, 스마트폰, 돈 이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여권이다.
특히 나같은 나홀로 여행자에게 생명과도 같다.
돈이나 스마트폰은 잃어버리면 빌리거나 다시 사면 되지만
여권은 한번 분실하면 여행 올스톱이다. 임시 여행증 발급받아 집으로....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다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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